『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2025.06.10 · 독서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윤동주 / 더스토리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1941.9 / p.43
<사랑의 전당>
순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 내사 언제 내 전(殿)에 들어갔던 것이냐?
우리들의 전당은 고풍한 풍습이 어린 사랑의 전당
순아 암사슴처럼 수정 눈을 내려 감어라. 난 사자처럼 엉크린 머리를 고르련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성스런 촛대에 열(熱)한 불이 꺼지기 전 순아 너는 앞문으로 내달려라.
어둠과 바람이 유리창에 부닥치기 전 나는 영원한 사랑을 안은 채 뒷문으로 멀리 사라지련다.
이제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 내게는 준험한 산맥이 있다.
— 1938.6 / p.71
<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 p.133
<산문 발췌>
나는 종점을 시점으로 바꾼다. 내가 내린 곳이 나의 종점이오. 내가 타는 곳이 나의 시점이 되는 까닭이다.
이 짧은 순간 많은 사람들 속에 나를 묻는 것인데 나는 이네들에게 너무나 피상적이 된다. 나의 휴머니티를 이네들에게 발휘해낸다는 재주가 없다.
이네들의 기쁨과 슬픔과 아픈 데를 나로서는 측량한다는 수가 없는 까닭이다. 너무 막연하다.
사람이란 횟수가 잦은 데와 양이 많은 데는 너무나 쉽게 피상적이 되나보다. 그럴수록 자기 하나 간수하기에 분주하나 보다.
— p.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