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즐거움』
2025.10.20 · 독서
🖋 히로나카 헤이스케 / 방승양 옮김 / 김영사 / 1992.12.10
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사람은 여러 가지 꿈을 갖게 마련이다.
우리가 꾸는 꿈 중에는 보잘것없는 꿈이 있는가 하면 대망이라고 말할 정도로 큰 꿈도 있다. 세월이 흘러도 퇴색하지 않고 계속 커 가는 꿈이 있는가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지는 꿈도 있다.
꿈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실현하기에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면 은연중에 꿈을 이루어 보려고 하는 힘이 생기거나, 또 그런 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삶이 가치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 동안 나는 특이점 해소만을 연구해 온 것은 아니다. 본디부터 나 자신이 풀 수 있는 문제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데, 내가 배우고 연구해 온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 홀연히 그 특이점 해소를 향하여 수렴해 갔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느낌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자신도 모르게 학생 때 가졌던 꿈에 이끌려 수학이라는 학문 세계에서 살아 온 것이다.
창조하려면 먼저 배워야 한다. 이것은 비단 학문의 세계에만 한정된 말은 아닐 것이다.
책을 통해 위인의 삶을 접하는 것은 젊은이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생활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 예를 들면 부모나 친구 가운데서도 소중한 인생의 스승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경이라는 것은 뜻밖의 경우에 닥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이러한 역경에 처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 나가는가 하는 데서 나타난다.
아버지의 자신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먹고 사는 것 만큼 이 세상에서 소중하고 강한 것은 없다는, 이제까지 겪어 오면서 몸에 밴 생활 철학에서 우러나오는 자신감이 아닌가 싶다.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해서 무엇이든지 무분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긴 인생에서 깊이 생각해야 하는 때가 몇 번 있게 마련이다.
어려움이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이때야말로 깊이 생각하는 힘이 요구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좋을지 전혀 알 수 없을 때, 혹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깊은 사고력뿐이라고 생각한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지혜라는 것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이 지혜가 만들어지는 한 공부가 한 것을 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그 가치는 여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배우는 것은 낭비가 아니다. 그러므로 많이 배우고 많이 잊어버리고, 다시 많이 배우라고 말하고 싶다.
‘8’자는 평면을 세부분으로 나눈 것이다. 실생활에서도 의견을 종합할 때에 서로 다른 의견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능력은 대단히 유용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폭넓게 생각하기 마련이고 또 그래야만 사고가 발생하고 깊어지게 된다.
우리가 인생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은 퀴즈나 테스트처럼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문제는 상당한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진정한 해결이 불가능할 뿐더러 문제 그 자체의 진의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긴 시간을 들여서 모든 것을 알아내기 전에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겠다는 태도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은 인연에 지배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모에게서 이어받은 것. 가까운 친구에게서 배운 것. 또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체험적 지식 등이 눈에 보이지 않는 덩어리로 자기 자신 속에 축적되어 ‘인’을 만든다. 그 ‘인’이 ‘연’을 얻어서 그 사람의 희망이 되고 행동이 되고 결단이 되고 길이 만들어진다.
경쟁의식을 가짐으로써 노력해야 할 목표의 초점이 보다 선명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먼저 상대방의 우수성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어야 한다. 상대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존경심까지 갖는다면 단적으로 말해서 상대가 성장하면 할수록 자기도 또한 클 수 있게 된다.
이런 경우에 부딪칠 때마다 그 아이의 명언을 소리내어 말해본다. “난 바보니까요.” 그러면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다. 눈앞이 밝아지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어차피 나는 바보니까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바보다’라고 자기 자신을 바로 잡음으로써 경직된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사람은 성공을 경험함으로써 자칫하면 소박한 마음을 잃어버리기 쉽다. 내가 실패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우수한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성공 경험만을 쌓아서는 안 된다. 때로는 성공에 필요한 만큼 노력을 했는데도 실패하는 경험을 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창조의 본질도, 창조의 구체적인 방법도, 또 그 바탕이 되는 핵심도 천재가 아닌 우리로서는 실패를 통하여 몸소 터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목표를 확실히 갖고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사람의 성장은 상당히 달라진다. 그 목표에 도달하는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목표가 그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되어, 일을 하게 하고 발전-진보시키기 때문이다.
상대방과 일체가 되어서 생각하면 자기가 상상도 못했던 문제의 원인이, 자기 혹은 상대방 안에서 발견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원인이 발견되면 나머지는 자신의 노력으로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된다.
실제로 행운을 살리고 또 역경도 살려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다. 큰 병에 걸려서 몇 년 동안이나 입원한 사람이 입원중에 책을 읽고 사색하며 글을 씀으로써 작가가 되어 성공한 것 등은 그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역경을 자기 인생에 플러스로 만드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을 때는 설사 고생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느긋하게 기다리고, 기회를 잡을 행운이 오면, 나머지는 끈기이다. 나는 남보다 두 배의 시간을 들이는 것을 신조로 하고 있다. 그리고 끝까지 해내는 끈기를 의식적으로 키워 왔다. 끝까지 해내지 않으면 그 과정이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결과가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두뇌가 우수하더라도 업적을 쌓지 않으면 수학자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노력이란 말은 나에게는 남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는 자기의 재능, 자질은 극히 적다. 또 자기의 눈에 보이는 재능이나 자질도 세포의 거대한 창고에 매장된 것에 비하면 바다 위에 떠오른 빙산처럼 극히 미미하다. 사람은 이렇게 미지의 자기 자신을 다 알지도 못한 채 죽는다.
자기의 재능을 모두 발견하고, 자기라는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인생은 너무 짧다.
그렇다고 해서 미지의 자기를 알려고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 물론 자기의 능력이나 성격을 인정하고 그 범위 내에서 살아가는 인생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 그럴 자격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도전하는 인생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도전이 없는 인생은 놀라움이나 커다란 기쁨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사람들은 가끔 이 다양성을 보지 않으려 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안주하고 싶고, 고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데 일류 대학에 들어가 일류 기업에 취직하는 소위 엘리트 코스에 들어가면 고민할 것도 없고 불안에 쫒길 일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에 대하여 눈을 감고 싶어하는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 보람을 창조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 속에 잠자는 가능성을 찾아내야만 한다. 아무리 어렵고 고생이 뒤따른다 할지라도 시대를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그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