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보다 높이』
2025.08.03 · 독서
📘 『심장보다 높이』
🖋 신철규 / 창비
<흐르는 말>
흐르는 물이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된다
떨어지는 말 낙차가 큰 말 바닥에 부딪쳐 으깨지는 말
생각 좀 하고 말해.
나는 생각을 하지 않고 말을 하고 있었나 생각을 덜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말이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불편한 사람은 생각이 많다 생각이 많아서 불편하다 비밀은 문지를수록 미끈거리거 거품이 나온다 혓바닥 위로 송충이가 기어가는 것 같다
생각 좀 너무 많이 하지 마.
눈앞에 있는 사람을 위로할 때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비난하게 된다 없는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없기 때문에 생각한다 적의 심장에 빠르게 칼을 찔러 넣기 위해 인간은 오른손잡이가 되었을까
우리는 소문으로 들러붙고 비밀로 밀어낸다
우리는 두 사람이 알 정도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일 우리는 소문의 끝이고 바닥 바닥에 고인 소문들이 부글부글 끓는다 범람하는 입과 밀봉된 귀 사이가 멀다
<심장보다 높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전기가 나갔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녹슨 슬픔들이 떠오른다 어두운 복도를 겁에 질린 아이가 뛰어간다
바깥에 아무도 없어요? 내 목소리가 텅 빈 욕식을 울리면서 오래 떠다니다가 멈춘다
심장은 자신보다 높은 곳에 피를 보내기 위해 쉬지 않고 뛴다
중력은 피를 끌어 내리고 심장은 중력보다 강한 힘으로 피를 곳곳에 흘려 보낸다
발가락 끝에 도달한 피는 돌아올 때 무슨 생각을 할까 해안선 같은 발가락들을 바라본다
우리가 죽을 때 심장과 영혼은 동시에 멈출까 뇌는 피를 달라고 아우성칠 테고
산소가 부족하진 폐는 조금씩 가라앉고 피가 몸을 돌던 중에 심장이 멈추면 더이상 추진력을 잃은 피는 머뭇거리고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고 할 말을 찾지 못해 바싹 탄 입술처럼 그때 내 영혼은 내 몸 어딘가에 멈춰 있을까
물이 심장보다 높이 차오를 때 불안해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깊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무의식중에 손을 머리 위로 추켜올린다
무너질 수 없는 것들이 무너지고 가라앉으면 안 되는 것들이 가라앉았다 꿈속의 얼굴들은 반죽처럼 흘러내렸다 덜 지운 낙서처럼 흐릿하고 지저분했다
누군가가 구겨버린 꿈 누군가가 짓밟아버린 꿈
어떤 기억은 심장에 새겨지기도 한다 심장이 뛸 때마다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번져간다
나는 무섭고 외로워서 물속에서 울었다 무섭기 때문에 외로웠고 외롭기 때문에 무서웠다 고양이가 앞발로 욕실 문을 긁고 있다
다시 전기가 들어오고 불이 켜진다 물방울을 매달고 있는 흐린 천장이 눈에 들어오고
어둠과 빛 사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서로를 조금씩 잃어가면서 서로를 조금씩 빼앗으면서
납덩이가 된 심장이 온몸을 내리누른다
<날짜변경선>
구름 위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지상에 내리기 위해 비행기는 성층권으로 진입하고 불안정한 대기에 기체가 요동을 친다
동그란 유리창에는 빗방울이 맺히고 간간히 천둥번개가 친다
비행기는 검은 해협을 가로지르는 고래처럼 묵묵히 앞으로 나아간다 좌우로 뒤뚱거리면서
내가 비행기를 타기 전 당신에게 쏟아부은 악담을 다 용서해줄 수 있겠어?
할 수만 있다면 비행기 밖으로 발을 뻗어 달리고 싶었다
안전벨트를 풀 용기도 없이 승무원의 의연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무거워진 공기가 긴 침이 되어 귓속을 찌른다 나는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침을 삼킨다
언제쯤이면 나를, 내 삶을 덜 증오하게 될까 나이가 들수록 증오는 더 거세게 타오른다 증오의 정점에서 나는 나를 밀어버릴 수 있을까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바를 넘는 순간 허공의 정점에서 잠시 멈춰 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먹구름 속에서 오늘과 내일 사이에 있었다
밤은 여전히 가시를 곧추세우고 으르렁거리고 있다
<어디까지 왔나>
빨랫감이 밀려 들에 가지 못한 그 여자 읍내 가전제품 가게를 지날 때마다 세탁기를 곁눈질하던 그 여자
국도 변에 있는 슈퍼에 들러 바빠서 못 샀던 외간장이며 설탕, 참기름, 미원을 외상으로 가져왔다 아이스께끼 하나 내 손에 들려주고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축축한 몸을 끌고 비탈진 신작로를 올랐다 아이스께끼도 끈적끈적한 땀을 흘렸다 등 뒤로 손을 내밀어 끌어주었던 그 여자
엄마 엄마, 어디까지 왔나. 동구까지 왔다.
끝도 없는 어질머리 속이 울렁거리면 등에 업혀 봉지에 남은 단물을 핥아 먹었다 달큼하고 비릿한 파마약 냄새
그 여자와 나의 심장이 걸음을 맞춘다 타박타박 큰 그림자 속 작은 그림자 숨바꼭질한다 그 여자 머리 위로 두 팔을 뻗으면 엄마는 외계인 엄마는 귀뚜라미 엄마는 두 팔을 치켜든 사마귀 그 여자가 나를 잡아먹지나 않을까 그 여자가 나를 버리고 도망가지는 않을까 목을 꽉 끌어안았다
엄마 엄마, 어디까지 왔나. 동구까지 왔다.
그 여자는 점점 외계인이 되어가고 멀고 먼 동구, 검은 동굴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엄마 엄마, 어디까지 왔나. 동구까지 왔다.
<폭우 지난>
나는 지은 죄와 지을 죄를 고백했다 너무나 분명한 신에게
빗줄기의 저항 때문에 노면에 흥건한 빗물의 저항 때문에 핸들이 이리저리 꺾인다 지워진 차선 위에서 차는 비틀거리고
빗소리가, 비가 떨어져 부서지는 소리가, 차 안을, 메뚜기떼처럼, 가득 메웠다 내 가슴을 메뚜기들이 뜯어 먹고 있다
뻑뻑한 눈 비틀거리는 비 폭풍우를 뚫고 가는 나비처럼 바닥에 떨어져 젖은 날개를 퍼덕이는 몸부림처럼
목에 숨이 들어가지 않는다 들어찬 숨이 나오지 않는다
너무나 분명한 신 너무나 많은 숨
이미 울고 있었지만 울고 싶었다 이미 살아 있었지만 살고 싶었다 이미 죽었지만 죽고 싶었다
운전석 천장에 물방울이 맺힌다 추위에 몸이 떨린다
컴컴한 방, 손전등을 입에 물고 두 손으로 비밀 금고의 다이얼을 돌리는 도둑처럼 앞으로 전진
다 쏟아내야 끝나는 것이 있다 너무나 분명했던 신이 보이지 않는다